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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30. 03:56 흥미만만/영상의 기억

영화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하지만 '영화' 백야행이 재미있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솔직히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영화 '백야행'이 참 재미있었다.




나는 소설을 읽은 뒤 드라마를 보고 그 후에 영화를 봐서, 의미를 부여하자면 차근차근 순서대로 '백야행'을 즐긴 셈이다.
책도 손에 땀을 쥐고 읽었고, 드라마는 아이들이 열연한 1화부터 마지막까지 눈물샘을 줄줄 떠뜨리며 보았다.
소위 말하는 '원작의 팬'까지는 아니어도 백야행이라는 이야기에 커다란 애착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영화로 만들어진 백야행이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던게 다행스러웠다.

한국에서 상/중/하로 출판된만큼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소설 백야행은,
모든 일의 원점인 어린 시절의 사건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성장기와 젊은 시절, 완숙한 어른이 될 때 까지의 기나긴 세월을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를 철저하게 배제하며 주도면밀하게 좇는다.
드라마는 정반대로 주인공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백야행을 그려나가는데,
야마다 타카유키와 다케다 테츠야의 예상 밖의 선전과 더불어 말그대로 드라마틱한 '결말' 덕에 
소설과는 차별화된 작품을 완성시켰다. 

소설과 드라마는 대략적인 줄거리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소설과 드라마에 대해서 예전에 쓴 리뷰 http://alivehiro.tistory.com/entry/백야행-vs-백야행
소설이 보다 스릴러로, 드라마가 보다 사랑이야기로 느껴지는 건 위에서 말했듯이 그려낸 시점이 다르기 때문일테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는 어땠을까?

스릴러로 보기에는 사건 전개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지고, 
사랑 이야기로 보기에는 요한(고수)과 미호&지아(손예진)가 같이 등장하는 장면이 너무 없었다는 비판은 적절하다.
사건의 출발점인, 요한이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도 어린시절의 요한과 지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서
설득력이 없었다는 지적도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애시당초 유키호와 료지의 공생관계가 애정 보다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욕망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아이들이 알콩달콩 서로를 좋아하는 모습은 귀여웠지만+_+) 
료지가 유키호에 대한 사랑으로 아버지를 죽였다기보다는, 
자신의 DNA를 제공한 자의 파렴치한 행위를 목격한데서 오는 충격과 혐오감, 그에 대한 반동적인 살인에 가깝지 않을까. 

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추악함을 아버지라는 형태를 통해 확인했을 때의 자괴감과 그런 아버지라도 부모를 해쳤다는 죄악감,
피해자 여성에 대한 죄책감으로 똘똘 뭉친, 비정상적일 정도로 순수함만 남은 료지는 기나긴 속죄의 길을 걷는다.
물론 유키호에 대한 애정도 어느 정도의 동력이 된 건 확실하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흉악한 살인만큼이나 나약했고
털어낼래야 낼 수 없는 죄책감을 병적일 정도로 씻어내려는 결벽증 환자였다. 
유키호 또한 드디어 전적으로 자신의 편에 설 물같은 인간을 만났으니 이전까지의 피해에 대한 보상심리가 더해져
료지에 대한 지독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던게 아닐까.


둘이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입장을 공던지기 하듯 주고 받았던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욕망과 이유 때문이지
결코 애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이 사랑했다는 시절의 묘사는 내게 크게 소용이 없고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영화가 지나칠정도로 어린 시절의 둘의 관계를 생략하고 고수와 손예진이 함께 얽히는 장면이 적었어도 
큰 거부감 없이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동수 형사(한석규)는 둘을 샴쌍둥이에 비교하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장면이 나온다.
이제 곧 등 붙이고 앉겠구나 싶은데 역시나 등붙이고 앉아주는 센스, 이런식의 예측 가능한 전개는 개인적으로, 흐뭇하다ㅋㅋ
그리고 드라마는 귀가 아프고 질리도록 태양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영화는 그런 걸 입아프게 강조하는 것 보다
이렇게 흑과 백을 대비시키는 방식(영화 오프닝에서 손예진의 배드신과 고수의 살인장면이 교차되는 것도)을 택한 것도,
장르적 특수성을 잘 살린 듯 자연스럽고 좋았다.

또 드라마가 고등학생 역에서 주인공으로 바로 넘어가는게 가능할정도로 두 주인공(아야세 하루카&야마다 타카유키)이
어린게 좀 거슬렸는데(소설은 주인공들의 연령이 훨씬 많아진 후에야 결말을 향해 치닫죠)
고수와 손예진은 더 나이를 먹어서 그런건지;; 원체 더 완숙한건지
보다 더 남성적이고 여성적이라 한층 더 비장했다. (형사는 더 젊어졌다는게 아니러닉하군뇨)


그리고 크게 놀라고 인상적이었던 건 세트 설정.
단순히 생각컨데 드라마 백야행 제작 환경에 비하면 영화 백야행이 자금면에서 유리한 환경에 있지 않을까 싶지만,
일단 폐선박이라는 장소 설정 부터, 모든 공간적 배경이 너무 극성스럽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아서 좋았다.
드라마가 내내 일상적이고 살풍경한 세트를 보여줘서 그런지(그건 그거대로 매우 설득력 있었지만)
마지막에 M&Y 패션쇼를 한다거나, 고수가 빌딩 옥상에서 떨어져서 유리창을 뚫고 추락하는 장면 등등,
영화스러운 세련됨에 눈이 즐겁더라.

산타복장을 한 미끼가 있고 흑백의 가면을 쓴 고수가 마네킹이 늘어선 곳으로 도망쳤을 때는 와우!
어차피 줄거리와 결말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살짝 몇몇 장치를 해주는 것 만으로도 새롭게 느껴져서 흥미롭다.




영화 백야행에서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게 배우들의 연기.
손예진과 한석규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친구가 한석규의 등장에서 '안심'했다고.
형사와는 다소 동떨어진 지적인 분위기가 난 좀 안타까웠는데(형사는 지적이지 않다는 주장이 아니예용)
우월한 발음과 목소리에는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전에 흘낏 본 아이리스에서 뭔가 말은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알아듣겠던 남자가 생각났다)

손예진은, '여우(女優 & 狐)'란 말이 딱 맞을 것 같다.
그녀의 나이대에 그만한 연기의 폭을 갖고 표현해내는 여배우가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어쨌든 '클래식' 때의 <흥, 이쁘기만 한 건 아니네> 했던 질투가 
'영화에서 적어도 연기만은 안심하고 볼 수 있겠구나' 하는 배우에 대한 신뢰로 완전히 전환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손예진이 조작된 차 사고 후 자신의 입양사실을 남자에게 고할 때
완전히 남자의 입장에서 손예진에게 넋을 잃고 같이 울고 싶어진 날 발견하고 깜놀;;;
영악해서 어리석은 짓으로 자기 무덤 파는 짓도 안할 것 같고. 흥미로운 배우이다.

그리고 '고수의 재발견'



고수를 인터뷰한 친구의 선배가 "야, 완전 천사야!" 했다던데;; 굳이 그 말로 확인 하지 않아도 선량함이 줄줄 새는
요 사람이 어쩜 그렇게 연기를 할 수가 있었을까??;;
사실 고수 드라마를 본 기억이 전무해서ㅡ_ㅡ; 그저 착하고 잘생겼을 뿐 특징이라곤 쥐뿔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고수의 하늘 아래 나는 너무 오만했나니.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근데 누가 캐스팅했는지 몰라도 박수를 쳐주고 싶은게 위에서 밝혔듯 료지(=요한)를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놈으로
생각하는 난, 고수의 선해보이는 분위기가 료지(=요한)라는 인물의 본바탕을 깔아주고 거기에 훌륭한 연기가 입혀져서
시너지 효과가 팡팡 터진걸로 보인다. 기대 이상이었다. 

기대 이상에 대해서 한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자면 바로바로 고수의 배드신+_+
상대가 연상의 농염한 분이라 그런지 에로틱함은 물론, 토할 길 없는 울분을 마구 뱉어내는 느낌이 팍팍 들어서 화끈했다. 
손예진의 배드신이 화제성을 목적으로 한다면,
고수의 배드신은 요한의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을 담아내기 위한 꼭 필요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섹스가 끝나고 여성분이 사정 또 안했냐는 대사를 하는데, 사정을 안한다는 게 료지(=요한)의 말없는 후회를 드러내는
키워드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관계상 전혀 건드리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삭제할 수 밖에 없다는게 안타깝더라.
뿐만 아니라 드라마가 자랑하는 다케다 아저씨의 콧물 줄줄 흐르는 눈물이 한석규의 미안하다는 짤막한 절규로 대체되고, 
이시다 나오미의 유령 감싸주기가 통째로 사라진 건 마음이 아프다 ㅠ.ㅜ 


   
그 외에 아쉬웠던게 있다면 역시, 이민정의 연기.(리뷰에서 보이는 꽤나 공통적인 의견)
꽃남에서 연기는 둘째치고 저런 심플한 단발머리를 하고 이렇게 예쁠 수 있다니 하며 감탄했는데,
연기가 미숙하다는 지적은 삼가한다고 해도 첫째, 발음이 부정확해서 전혀 똘망똘망한 비서 같지 않았고 
둘째,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눈화장이 너무 도드라져서 거슬렸다. 그런 아이라인과 속눈썹이 꼭 필요했을까?
원체 예쁘니까 너무 눈을 강조하지 않는 편이 비서 역에 보다 어울렸을 것 같은데...어쨌든 나오는 내내 아쉬웠다.
꽤 비중있는 역할인데 영 시원찮았다.
 
또 드라마 백야행은 주인공의 어린시절을 초등학생으로 설정해놓았지만 그리 큰 노출이 없었는데 비해
영화는 중학생으로 설정해놓고 등을 홀랑 벗겨놔서 깜짝 놀랬다.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한국과 일본이 선을 긋는 기준의 미묘한 차이가 재밌었다. 
 
나에게 백야행이란 마치 아직 다 맞추지 못한 거대한 퍼즐과 같아서,
드라마와 영화를 볼 때 마다 퍼즐을 완성하기 위한 나머지 조각들을 줍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양한 조각들을 여기 저기에 붙여보며 고분분투하는 과정이 즐겁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모든 것의 원점임에는 틀림없으나, 소설 마저도 이야기의 일부만을 간신히 담아낸 듯,
이야기 자체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독립된 생명체 같아서 접할 때 마다 항상 불안하고 흥분된다.

영화 내내 빨려들어갈 것 같이 몰입하지는 않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 그런 내 개인적 이유 때문.

그래서 백야행을 소설도 드라마도 전혀 본 적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감상해보고 싶은게,
영화적 완성도 운운하고 싶은 건 허영심 때문이라고 쳐도 영화를 시작으로 드라마와 소설로 넘어가는
느낌이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 

기나긴 포스팅을 끝으로 깨달았는데, 난 그저 백야행의 일개 빠순인 듯 하다.ㅡ_ㅡ;;;;
덧붙여, '요한'이란 이름의 유래가 설마 몬스터는 아니겠지 싶은 호기심이 반짝반짝. 
덧붙여, '요한'이라는 단어만으로 임파루스의 꽁트도 생각나니... 본인의 오탁스러움에 할 말을 잃는다...ㅡ_ㅡ;; 

posted by stead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