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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가야'에 해당되는 글 1

  1. 2008.12.22 칠지도-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 &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2008. 12. 22. 18:04 카테고리 없음



일본은 고사기와 함께 일본의 최고(最古) 사료로 여겨지는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의 신무천황이 가야를 정복하고 신라를 격파해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임나일본부'를 통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료에 기록되었을 뿐, 실제로 한반도 남부에 일본계 유물이 전무한다는 사실(200년이나 지배했으면서 유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등을 들자면 어디까지나 '설'에 그칠 뿐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특히 일본서기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기 보다 왕권-천황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지향하기 위한 미화적 성향이 짙은 사료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측 학자들도 사료로서의 객관성을 의심하면서 임나일본부설에 관해서는 신뢰하려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1868년 일어난 메이지 유신은 천하의 지배권이 약 700년간 일본을 지배했던 무사정권으로 부터 다시 천황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지향했던 일본은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이를 위한 물밑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1874년 나라현 텐리시에 위치한 이소노카미 신궁에 간 마사모토가 임명된 것 또한 국수주의적인 방향으로 역사를 재정립하여 천황의 지위를 바로 세우고 이를 통한 정신적 무장으로 근대국가의 기반을 튼실히 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궁 뒤편의 사람의 출입을 금한 곳에서 발굴을 시작한 간 마사모토는 천황의 신기를 포함한 다수의 유물을 발굴하게 된다. 여기서 발굴된 나뭇가지 모양의 칼이 바로 '칠지도'이다.
 간 마사모토는 이 칠지도가 일본사기와 함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백제의 왕이 왜왕에게 칼을 '헌상'했다는 주장은 당시 일본의 국수주의적 분위기와 맞물려 한반도 지배설에 박차를 가했고 수많은 연구들이 쏟아졌댜. 
 발굴 당시에는 굉장한 녹이 묻어 있어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글자들-칠지도에 새겨져 있었던-이 훼손되었다. 발굴 후 약 100년의 시간이 흐른 1981년 NHK에서 엑스선 촬영을 통해 훼손된 글자를 식별하는 실험이 행해졌고 칼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한 결과 백제가 '후왕'에게 이 칼을 주었으며 '전세후시' 즉, 후세에 널리 이 칼을 보이도록 하라는 구절을 밝혀냈다.

 백제가 일본을 속국으로 삼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만약 후왕제가 있었다면 백제는 왕이 아닌 황제가 되어야 마땅하나 그런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시 무기란 힘이 강한 나라가 그 밑이라고 생각되는 나라에게 '하사'하는 것이었고 칠지도를 만든 기술은 '단조', 즉 불에 단군 철을 두들겨 만드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일본은 이와 같은 고급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철과 기술의 확보가 국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고대 4세기 무렵에 이처럼 세련된 기술을 갖고 있던 백제가 일본보다 밑에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의 일이다. 칼이 제작된 시기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남과 북으로 세력을 넓혀 국력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즉 칠지도는 백제가 최고의 기술로  제작한 칼이며 국력의 신장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일본에게 하사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다큐멘터리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편에서는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논란과 가야-특히 안라가야와 일본의 관계에 주목해 임나일본부설을 재조명한다. 
 메이지유신 후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던 일본이 만주에 보낸 첩자 사카와 가케노부는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한반도에 현존하는 기록중 가장 오래된 기록)글자들을 종이에 대고 그려 일본에 갖고 돌아온다. 거기서 현재까지 논란이 그치지 않는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많은 학자들은 이 문구야말로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초에 광개토대왕비는 아래로 위로 영토를 확장하고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당한 고국원왕의 복수를 하기 위해 백제를 주적으로 삼았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만든 비였다. 곳곳에는 신라와 백제의 영토를 빼앗았다는 문구가 등장하고 문제가 되는 구를 제외한 곳에서 등장하는 '왜'라는 단어는 가끔씩 출몰했던 왜구를 무찔렀다는 정도의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할 만큼 대규모의 군사를 파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왕권이 강화되고 철기 문화가 확립된 고대국가의 기틀이 튼튼할 때 외국으로의 파병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일본 국내의 선박이동이 불가능했던 일본의 조선술을 생각할 때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배롤 통해 한반도로 건너가 육상싸움에서 제압했다는 주장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상황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주장이 된다.
 그리고 1970년대 경 광개토대왕비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것은 세차례에 걸친 탁본을 비교할 때 없던 글자가 삽입되었고 실제로 광개토대왕비를 확인했을 때 다수의 석회성분이 발견되었다는 근거를 갖고 있다. 중국의 어느 학자는 이 주장을 반박했으나 광개토대왕비 조작설은 여전히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

 한반도 남부 지배설이 억측이라는 것을 증명할 자료는 가야- 특히 안라가야와 일본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그 어떤 정치체제의 영향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로 존립했던 가야국들 중에는 가장 세력이 컸던 금관가야와 철 생산지와 고도의 제조기술로 세력을 넓혔던 안라가야 등이 있다.
 고대 국가들은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철과 그 제조기술을 확보해야 했다. 당시 일본은 철을 생산하지 못했고 따라서 철의 제조기술 또한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안라가야는 이미 철로 갑옷을 만드는 정교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고 이와 아주 유사한 갑옷이 일본에서 안라가야 보다 약 백년 정도 늦은 시기에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은 안라가야에게 철을 공급받고 제조기술을 전수받은 것으로 보인다. 철과 제조기술을 전수해주는 국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조선술과 대규모 파병이 불가능했던 일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면 일본계 유물이 남아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전무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분 전방후원군도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은 그 기록이 정확하지 않을 뿐더러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일본의 국수주의적 미화적 노력이 투영된 가공의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대두된 시기는 일본이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식민지를 통해 대외적인 확장을 꾀하려던 시기와 맞물린다. 정한론등, 조선반도의 지배를 정당화할 계기를 찾고 있던 일본에게 칠지도의 발견과 광개토대왕비의 문구는 일본사기 이외의 역사적 자료로서 충분히 이용가능성이 있는 유물이었을 것이다. 역사가 현재의 추세에 따라 재해석되는 것은 어느시기에나 빈번한 일이었고 이해를 아주 못할 정도의 일은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 여러가지 자료들이 추가로 발굴되고 왜곡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현 상황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학자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이며 한국와 일본의 건전한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고대 한반도가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일본이 그것을 숭배했다는 사실이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사실이 일본의 우월성은 물론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번지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은 일이다.
 일본의 정보수집과 보존 능력, 그리고 성실한 연구태도는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감탄을 금치못하게 했다. 다만 아쉬운것은 이런 훌륭한 태도가 역사왜곡의 앞잡이로 변질되었던 당시 상황이다. 
 일본과 한반도는 고대를 연구할 때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미래의 건설적인 관계와 현재의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양국은 긴밀하게 협력하고 과거의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더욱더 객관적으로 역사에 다가서는 마음가짐으로 연구에 임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stead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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