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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8. 00:53 흥미만만/마음의 양식

주변에서 다들 온다 리쿠 온다 리쿠 하는데, 정작 일본 소설을 거의 매일 읽고 있는 나는 온다 리쿠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방금 샤워하면서 곰곰이 옛 기억을 뒤져보니, '금지된 낙원'을 조금 읽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역시 온다 리쿠와 나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금지된 낙원을 중도 포기도 아니고 앞에 몇 장 팔락팔락 넘기다 끝낸 이유는 간단하다. 초반부에 흡입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휘리릭 몰입한 미야베 미유키 등 여타 다른 작가들의 책과는 달리 초반부가 내 흥미를 전혀 끌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온다 리쿠 냄새는 맡지도 못하고 도서관에 금지된 낙원을 반납했다. 

그러다 이번에 방한하는 일곱명의 작가들 중 그래도 좋아하는 축에 껴줄 수 있는 사람이 요시다 슈이치 밖에 없어서, 이건 좀 아니지 싶었다. 그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어떻게 알아! 에쿠니 가오리야 몇 권 읽었으니 내 취향이 아니라고 분명히 판명되어 아쉬울 것이 없지만, 후에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너무도 재밌어서 나중에 '그 때 사인이라도 받아두는 건데!' 하는 마음으로 뒤늦게 땅을 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나의 친구가 하도 온다 리쿠 노래를 부르길래, 금지된 낙원의 아픔을 잊고 다시 다른 책을 시도할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니 친구가 무라카미 류를 좋아할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했고, 이사카 코타로의 책을 추천할 때 시무룩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찬양한 작가는 절대지존 미야베 미유키 뿐이다.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사실은 미세한 간격의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의 취향은 온다 리쿠 지점에 다다르자 드디어 그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온다 리쿠에 대한 시무룩한 대답을 보낼 차례이다.

친구의 추천과 인터넷 정보를 참고해서 유지니아를 골랐다. 일가족 몰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어린 소녀를 범인으로 설정하다니 이렇게 흥미진진할수가!! 추리소설협회 대상이래!!! 하며 들뜬 나의 마음은 책의 중반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한 줄 두 줄 눈을 좇는 것 만으로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미야베 미유키에게 받은 적 없는 선물이었다. 그건 아마도 수학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차근차근 인내심과 따스함을 갖고 풀어나가는 미야베 미유키의 표현방식과는 전혀 다른 '온다 리쿠'의 문체와 구성력 덕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작하는 작가의 소설이 맘에 든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당분간 무얼 읽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 권 한 권, 저작목록이 줄어들수록 느껴지는 뿌듯함도 지속될 것이고, 소설이 주는 즐거움과 작가에 대한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 아름다운 양식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말을 향해 갈수록 그녀의 '돌려말하기'방식에 초조함을 느꼈고, 그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초조함이 아니라 소설과 작가에 대한 짜증으로 직결되는 기분 나쁜 감정이었다. 내가 월요일 하루 컨디션을 버리고 일요일 밤 잠들지 못한 채 끝까지 읽는 것을 택했지만,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 ㅠ.ㅜ


솔직히 말해서 모두가 인상깊었다는'사실이란 주관적 감상에 불과하며 모두의 기억이란 자신이 원하는대로 짜맞춘 허상에 가깝다. 픽션도 논픽션도 없다'는 (이 책의 주제로 추정되는 ) 구절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인상도 주지 못했다. 그건 당연한거 아닌가? 팩트로 이루어진 신문도 실은 일종의 칼럼에 가까운데, 하물며 내 기억속의 옛 일이란 내 구미에 맞게 재구성된 판타지와 다를 것이 없다.
굳이 꼽아보자면 인터뷰에 응하는 인물들의 인생사와 그들이 갖고 있는 인생관, 가치관이 조금 흥미로웠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아낌없이 시간을 할애하는 인간을 꿰뚫어본다, 자신들의 시간은 조금도 주려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반발하려는 건 당연하다, 내가 되새기고 곱씹은 부분은 대체로 이런 구절이었다. 하지만 '인터뷰', '추리소설','다양한 인물들의 인생사와 가치관, '사회(집단)의 굴곡(어두운 면)'이라는 소재로 분류될 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뛰어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건 관계자들과의 증언을 인터뷰하는 대화체 형식으로 적은 것은, 금지된 낙원이 그랬듯 초반 몰입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중간에 기껏 모은 몰입도를 막판에 분산시켜 나같은 독자들을 화나게 하는 마이너스 효과를 만들어낸다. 어찌나 신경질이 나던지...이제 그만 인터뷰 따위 집어치우고 얼른 상세하게 당시 상황을 전하란 말이다!!!!!!!!!!!!!!!!! 하고 나는 몇 차례나 절규했다OTL.

결과적으로 그녀가 범인인지, 책을 쓴 이는 왜 그렇게 죽었는지, 왜 가족을 포함해 그 가족을 전부 죽였는지, 책쓴 이의 둘째 오빠의 그 고백은 왜 갑자기 중간에 튀어나와 소설의 흐름을 흐리는지, 등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하나도 하지 않고 색채대비를 이용한 시각적 효과와 동기를 결부시켜서 모든 것을 애매모호하게 만든 그 무책임함!

몽롱한 분위기,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동경, 서정적인 문체가 돋보이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이야기 전개의 허점을 덮어줄 수는 없다.

친구와 내가 '힘이 딸렸다'라고 표현하는 그 상태, 일 다 저질러 놓고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등장하는 엉뚱하고 설득력 없는 결말. 
이제 두번 다시 온다 리쿠의 책을 펴는 일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온다 리쿠가 아니니까 확실한 결말을 내겠다.


우리는 궁합이 맞지 않아요...
 

  
posted by steadyoung